직업의 소명의식이 깃든 아이스크림 가게
염리동의 작은 아이스크림집, 녹기전에를 아시나요? 이곳은 특이합니다. 노션으로 메뉴를 전달하고, 주변의 학교 개교기념일을 챙겨주고, 또 브랜드들이 기꺼이 시간을 내 찾아오는 작고 소박한 공간이죠. 아이스크림 할인점이 우리의 낭만을 대체한 지금, 이 작은 아이스크림집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어린이들이 많은 곳이든, 어른이들이 많은 곳이든. 옛날처럼 정감 넘치는 아이스께끼 대신 아이스크림 할인점이 더 많고, 아주머니랑 소소한 대화를 나누던 슈퍼 대신 편의점이 더 많은 지금.
염리동에서 자신만의 철학으로 <녹기전에>라는 아이스크림을 통해 자신만의 직업관을 펼쳐 나가고 있는 ‘녹싸’님과의 대화 기록
🍧 1. Brand ‘ 녹기전에’
모두에게 간단하게 기쁨을 주는 , 녹싸만의 아이스크림
Q. 왜 사업 아이템으로 ‘ 아이스크림’을 선택하셨나요?
A: 많은 직장인들이 퇴사 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무슨 아이템으로 창업할까 고민하며 아이템을 결정하곤 하지만 저는 애당초 그거랑 완전 다른 길이였고 직업 찾는 저만의 방식이 있었어요.
저도 직장을 짧게 두 곳 다니면서, 직장에 안 맞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했어요. 모두 안 맞아도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할 수도 있겠지만, 10년 20년 굴러가면 무조건 제 인생이 잘못될 거라는 걸 알았어요.
회사에 들어가서도 동기나 선배들한테 전 곧 나갈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닐 만큼 확신이 있었고, 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했어요. 그 당시에 일기를 썼는데 지금 보면 굉장히 침울해요. 당시에 '소명의식'이라는 단어 자체에 궁금증이 생겨서 백과사전을 찾아보다 한 논문을 보게 됐는데, 거기서 직업을 인간이 세 가지로 나눠서 대한다고 하더라고요.
직업이란 1) JOB 2) CAREER 3) CALLING / CALLED로 나뉩니다.
먼저 1번인 JOB 같은 경우에는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한 업무, 2번인 커리어 같은 경우에는 1번에서 조금 더 성장하여 개인적인 시간을 할애해서 소속된 조직 안에서 직책이나 명성 등 성장이나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 마지막 생소한 개념인 3번 콜링 혹은 콜드 같은 경우에는 내 일과 삶이 분리가 안 되는 단계예요. called가 ‘종교적으로 부름을 받았다’라는 의미의, 소명 의식이라고 해요.
더 나아가서, 홀드라는 개념이 있어요. 내 일과 삶이 분리가 안되는 개념을 벗어나, 항상 일만 생각하고 그 일이 내 삶에 어떤 도움이되고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심층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단계를 말해요.
근데 제 관점에서, 뭐가 더 나은 선택인지가 아니라 사람이 태어나서 대충 20년 넘게 살면 자기가 그 세 가지 카테고리 중에 어디에 속해야 되는지가 좀 분명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
친구들 중에는 굉장히 많은 친구들이 그냥 잡을 해서도 행복한 친구들이 있어요. 그냥 회사에서 조금 짜증 나지만 돈 벌어서 뭐 레저하고 취미생활 하고 결혼해서 자식 키우는 자식 키우고 가족 구성원을 형성해서 그게 제일 행복인 사람들도 있고 아니면 직장을 자기가 설정해서 거기서 내가 올라가는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고.
저는 그런 거는 너무 거리감이 좀 있고 저는 그냥 제가 어떻게 제 속에서 뭔가 우러나오는 것들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기도 어렵고 뭔가 계속 나오는 것 같은데 이걸 표현할 수단들을 찾고 있었거든요. 그걸 하려면 어쨌든 소명 의식을 발휘해야 되는 거구나라고 그때 깨달았었어요.
직업의 ‘소명의식’을 찾기 위해, 오감을 통해 제 직업을 발견했어요.
저는 이 셋중에 속하는 방법을 소거법으로 직업 찾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오감이 좀 예민한 편인데, 사람이 역치라는 게 있잖아요. 향기를 맡다가 막 몇 분 수십 분 지나면 이제 향기가 안 나게 되는 단계가 있잖아요. 근데 직업을 대하는 것도 좀 똑같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저는 뭐든 2년 이상 한 사례가 없더라고요. 살아보니까 난 되게 ‘빨리 질려서 다른 걸로 자꾸 넘어가는구나’라는걸 느꼈어요. 직업이라는 건 최소 5년은 해야 되는 것 같은데, 그러면 안 질리는 걸 일을 해야 되고 질린다라는 것의 정의 자체가 오감을 사용하는데 그게 역치가 높아져서 더 이상 닿지 않는 거죠. 그게 질린다라고 정의를 내렸거든요.
그러면 내 오감 중에서 질리지 않고 오랫동안 했던 게 뭐가 있나 이 감각 하나하나를 부위별로 찾아본 거죠. 그렇게 찾은 게 미각이었는데, 내가 오랫동안 먹는 게 있나 했더니 면이랑 아이스크림이 나오더라고요. 그거는 평생 안 질렸었어요.
그래서 아이스크림 시장을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동대문 현대시티아울렛에 젤라또 가게에서 매니저 일을 3-4개월 했고요. 아이스크림을 직접 다뤄보면서 제 감각들이 이 직업에 어떻게 소화되는지 알게 됐고, 그게 즐겁더라고요. 커피나 이런 것들처럼 내가 매번 내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스크림은 전날이나 당일 아침 미리 만들어두면 이후에는 직원들이 잘 팔 수 있고, 저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라이프 사이클도 잘 맞았구요. 그리고 제가 언어화할 수 없는 생각들이 자꾸만 떠오르는데 이런 것을 표현할 붓과 팔레트가 필요했는데 아이스크림은 컬러도 다양하고 지감도 다양하고 재료도 많아서 이걸 소화하기 좋은 캐릭터 플랫폼인거에요.
그리고 또 하나의 생각은 이랬어요. 사실 어떻게 보면 저희 매장에서 핵심적인 요소일 수 있는데, 저희 매장에 대해서 얘기하다 보면 결국에는 돌아돌아돌아 돌아가서 시간이라는 단어로 결국 떨어진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저는 제 평생의 화두가 시간이에요. 어렸을 때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보다 만지고 보는 거에 좀 관심이 있었어요. 왜냐면 우리가 한 화면을 보고 있으면 시간의 흐름을 알기가 어렵지만, 시계랑 아이스크림만은 흘러가더라고요. 아이스크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녹잖아요. 이게 아름다운 시계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이스크림은 저에게는 '음식'이라기보다는 '시간'이에요. 그래서 내 많은 생각들을 많이 담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저는 그냥 아이스크림장입니다. 저는 제가 하다 못해 아이스크림 만들고 있다고 종종 얘기하는데 이유는, 제가 생각이 되게 많은데 이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장치가 아이스크림이 이더라고요. 다른 게 생기면 또 다른 거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저는 원래 그 직업을 5년에 한 번씩 바꾸려는 생각이 굉장히 강했었고 그래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5년만 하고 5년 때까지 잘 되고 있던 가게를 갑자기 어느 날 다듬으면서 사람들한테 충격을 주는 게 목표였어요.
근데 하다보니 너무 재밌어서 그 생각을 취소했어요.
🍦 2. 끝없는 섀도우 복싱으로 탄생한 콘텐츠 장인 녹싸
콘텐츠 장인 녹싸
저는 콘텐츠를 엄청난 계획과 여러 생각으로 시도하진 않아요. 생각나면 바로바로 시도하는 편이고, 스타트업 용어로 하자면 애자일하고 린하게 시도하는 편이에요.
녹기전에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콘텐츠는 고객들과의 티키타카로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30%는 저희가 던지고, 20%는 채워주는 고객들이 있어요. 나머지 부분을 또 저희가 채우고 그런 형태.
사람들에게는 상황에 맞는 다양한 페르소나(역할)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는 재밌고 싶은 욕망, B급 정서가 있는데 그건 주로 온라인에서 표출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런 것들을 생산하거나 참여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기꺼이 펼칠 수 있는게 저희 매장 같아요. 여기서는 어떤 짓을 해도 된다! 라는 일종의 프로토콜(신호)이 된 것 같아요.
티키타카도 가능한 공간이 있더라.
사실 저희도 처음부터 고객분들과 티키타카가 되었던건 아니예요.
제 첫 매장이 익선동이었는데, 익선동은 매장이 지금보다 작았어요. 매장에 들어오면 걸어들어오는 구조가 아니라 횡으로 걸어야 하는 구조였어요. 그 공간을 고른 이유가 머무를 공간이 없으니 아이스크림을 들고 익선동을 걸을거고 그럼 고객들이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공간이겠구나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그리고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이유는 오프라인 공간은 작지만 온라인 공간은 무한하니까 뭐든 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고요.
이 생각과 동시에, 지금처럼 콘텐츠를 올렸어요. 만우절도 챙기고, 식목일엔 전부 녹색 메뉴로 다 깔고요. 근데 익선동은 너무 기획된 곳이 많고, 변화가 빠르다보니 뭔가 야심차게 준비를 해도 한 번 들렀다 가는 고객들에게는 늘 새롭기 때문에 변화라고 보여지지 않더라고요. 익선동은 진짜 패스트리테일링이었어요. 계속해서 오는 손님의 연령대, 국적, 패션 등이 바뀌었죠. 이 곳은 뭘 준비해도 안 통하는 공간이라는 걸 알았어요. 저 혼자서 계속 셰도우복싱을 한거죠.
익선동에서 염리동으로 가게를 옮기고,
당시에 메뉴판을 노션으로 만들었는데 익선동에서는 반응이 없던게 염리동에서는 반응이 있었어요. 내가 열심히 여러가지를 시도하는데 그걸 봐주는 공간이구나 싶었고, 트래픽이 무조건 많은 공간이 다는 아니구나. 나한테 맞는 곳이 있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보통 부동산을 볼 때, 아이스크림 업종이라고 하면 매번 사거리에 횡단보도 앞 이런 자리를 보여주시거든요. 근데 저희는 허름하고 사람들이 잘 안 찾는 공간을 선호한다고 말씀드려요.
- 물질이 커지면 중력이 자연스럽게 생기고, 물질 사이에서도 인력이 작용하잖아요. 저는 가게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원래 조용했던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서 놀이공원처럼 웅성웅성 모여서 놀고 있는 것 같으면, 뭐지? 하고 사람들이 들여다보잖아요. 이게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요인 같아요. 저희는 계속해서 사람들의 관심도가 집중되도록 살을 붙이는 작업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걸 알았어요.
- 익선동에 있던 기간에는 팔로우가 2,700명이었는데, 지금은 1.5만 (있던 기간은 비슷) 저희는 입소문으로부터 점점 인지도를 키워가고, 느리지만 밑에서부터 올라간 경우에요. 전 이 패턴이 굉장히 튼튼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3. 성장보단 생장 , 혼자보단 또 같이
근처 학교들의 개교기념일을 챙기시잖아요.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A: 저는 살면서 고등학교도 조기졸업을 했고, 대학교에서는 대학교가 사라졌고, 군대에서도 내무반 생활을 안하고 두 명이서 장군을 모시는 일을 해서 소속감이 늘 없었거든요. 그래서 전 여전히 제가 세상에 부유하고 있다는 느낌, 뿌리가 없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그래서 가족적인 정서가 있거나, 특정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예쁘더라고요.
근데 코로나 시국이 지나면서 소속감을 못누리게 된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소속감을 줄 수 있는게 뭘까 하다가 개교 기념일을 생각해냈어요. 서강대가 시작이었는데 어떤 학생이 학교 커뮤니티에 "교수님보다 녹싸가 더 본인들을 챙기는 것 같다"라는 의견을 남겼다고 해요. 그때 이후로 확장하게 됐어요. 서울여고 개교 기념일에 200명의 학생이 왔었는데, 그 장면은 제가 죽을 때 딱 생각날 것 같은 장면 중 하나일 만큼 감동적이었어요. 못 잊을 것 같아요.
녹싸님이 바라는 [녹기 전에]
A: 저는 '성장'보다는 '생장'이라는 말을 선호해요. 식물처럼 보이지 않게 커나가고 대신 튼튼하게 자리하고 싶어요.얼마전에 수량 680년 된 나무를 봤는데 저는 그런 나무같은 공고함을 꿈꿔요. 사실 제가 나무 심기 하는 것도 환경을 위해서도 있지만, 우리가 사는 동안 커가는 게 안 보이잖아요. 다른 측면데서는 되게 긴 목표에 대한 의식을 사람들한테 좀 주고 싶어요.
저는 짧은 건 쾌락이고 긴 건 감동이라고 생각을 해요. 지금 나무를 심고 우리가 10년 뒤에 그 나무를 보면 정말 커져 있을거거든요.그 결과물을 보면 머릿속에 분명 갑자기 빵 하면서 깨이는 게 있을 것 같아요. 그분들이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조금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좋은 세상을 구현해 나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 4. 안나의 마무리 코멘트
일과 삶, 삶과 일. 둘은 떼내려야 뗄 수 없는 참으로 친화적인 관계이다.그중에서도 보다 나은 삶을 자신만의 브랜드를 통해 표현하는 , 또 소신이 담긴 말들을 볼때면 ‘이분은 왜 이런 생각을 가졌을까?’ 또는 ‘이 아이스크림집은 왜 유명할까?’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오르곤 했다.
그리고 말로만 듣던 녹싸님을 처음 만나뵐 수 있었던 날이 있다. 내가 속한 커뮤니티의 모임으로 회사도, 동네도 아닌 약 1시간 20분동안 거쳐 간 그곳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아이스크림’으로 기쁜 순간을 선물해주는 공간이였다.
또한 녹싸님의 소명의식과 삶, 일의 가치관을 듣다보니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초년생으로서 마음이 각박해진 나에게 한명의 사람과 인연들을 대하는 아름답고 고운 그런 생각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래서 최근 출간한 ‘좋은기분’이라는 책도 구매했다. 이 모임 당시 접객가이드를 비치해 놓을것이라던 녹싸님에 말에, 은근히 몰래 몇번 더 가서 아이스크림을 구매하기도 하고, 슬쩍 읽어보려 했는데 실제 책으로 출간되니 그 감정이 더 잘 와닿는 느낌이다.
내 삶이란 무엇일까? 항상 일과 커리어에 욕심내던, 하지만 나만의 소명의식은 가지기 힘든 아직 초기의 단계에서스스로의 삶을 불행하지 않고 행복으로 꾸려나갈 수 있는 즐거운 일을 찾을때까지 , 이런 탐구는 계속될거 같다.
추신. 지금은 짧고 굵은 소회들을 개인 노션에 기록중이지만, 언젠가는 나만의 채널로 공개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일을 할때는 애자일하고 빠른 속도감을 좋아하지만, 정작 나만의 기준에서는 꽤나 완벽주의에 시달려 아직도 세상에 내놓지 못한 나의 생각들을 지금 이 블로그에 기록하고 있다. 부디 꾸준함이 계속 되기를!